좋은 논문이란 무엇일까
논문을 읽기 시작한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석사학위가 있지만 난 석사과정 때 논문이라는 것을 읽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는 논문을 읽고 쓰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사과정에 들어온 후로는 논문을 읽어야할 일이 많이 생겼고, 읽다보니 좋은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번 내 나름대로, "좋은 논문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정리한 생각을 이곳에 써보고자 한다.
일단 통상적인 관점에서 '잘썼다'라고 생각하는 논문은 어떤 논문일까?
1)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논문
2)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적용한 논문
3) 생소한 타 분야의 이론을 적용한 논문
4) 논지전개가 탄탄한 논문
5) 문장력이 좋은 논문
좋은 논문에는 위와 같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것은 논문을 많이 읽는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주 명료하다.
"신선한 관점이나 이론 혹은 방법론을 적용해 연구를 하고 그것을 탄탄한 논지전개와 훌륭한 문장력으로 보여준 논문." 이라고 정리하면 될까.
그럼 못 쓴 논문이란?
"진부한 관점이나 이론 혹은 방법론을 적용해 연구하고 그것을 엉성한 논지전개와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으로 작성한 논문"
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싱거워진다.
사실 내가 이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위의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물론 위에 제시된 좋은 논문을 위한 조건들이 중요하다는 것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좋은 논문의 표면적인 모습일 뿐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연구라는 것은 왜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연구를 수행하는 당사자인 대학원생은(나를 포함한) 오히려 잘 대답을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연구는 때때로 그 존재의 진정한 이유는 가려진채 실적을 위한 도구이자 밥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먼저 다가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이유에 갇혀있으면서도, 어쩌면 오히려 우리는 그 정답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연구를 하는 이유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함'이라고.
즉,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지 못하는 연구는 연구로서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 반면에 인류를 변화시킬 거창한 지식은 아니더라도, 학문의 세계에서 진리를 향해 한걸음이라도 더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지식을 창출한 연구라면 어떠한 연구든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가치있는 논문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학계에서 향후 연구자들의 연구의 발판이 될, 혹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한 논문"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정말 '좋은' 논문이 무엇이냐 했을 때는
"해당 논문이 창출하는 새로운 지식이 그 분야에 중요한 인사이트를 주면서도,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큰 영감과 질문거리를 던져주는 논문"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논문들은 귀하다. 사실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상당히 많은 논문들은 "어떻게 하면 학계가 품고있는 중요한 질문에 대한 앎을 넓혀나갈 것인가"에 고민을 집중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리뷰어가 accept하게끔 논문이 fancy해보이고 차별화되어 보일 것인가"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기존의 논문과의 차별점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논문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좋은 논문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특성일 뿐이다.
새로운 지식 창출은 왜 중요할까?
그것은 인류가 가진 앎을 넓혀주기 때문이며, 미지의 영역을 밝혀주어 우리가 불확실성 속에 던지는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질문, 즉 먼저 앎에 대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새로운 지식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은 언제나 호기심과 질문에서 비롯되며 이에 대한 나름의 스토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연구의 목적이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논문은 언제나 질문에서 시작해서 답으로 향한다.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탐구와 그 결과물인 새로운 지식 창출로 이어진다.
따라서 좋은 논문의 시작은 '좋은 질문'이다. 그 질문은 결코 논문을 쓰기 위해 짜내거나 끼워맞춘듯한 것이 아니며, 연구자가 진정으로 알고자하고 해결하고자하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반면 평범한 논문은 좋은 논문과는 반대의 특성을 가진다.
그러한 논문들은 답에서 시작하여 질문으로 향한다. 다시 말해, 결과물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을 적용하고, 어떻게 데이터를 분석해서 이런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것은 논문으로서 얼마나 가치가 있을 것인가, 다른 논문과 얼마나 차별될 것인가, 얼마나 새로워 보일 것인가.."
이런 논문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이 충족하는듯 보이면 그제서야 질문으로 향한다. 논문의 꼴이 먼저 상상이 되면, 그 이후에야 연구자가 품었어야 할 호기심을 설정하고 그것이 좋은 질문인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로부터 접근하여 거꾸로 도출된 질문은 대개 인위적이고 울림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러 논문을 읽다보면 상당히 많은 논문들이 다른 평범한 논문들과 차별된 연구자만의 '문제의식' 또는 '해결하고자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며, 이론이나 방법론, 사용하는 변수의 종류 등 겉치장만 달라보이게 꾸미는 경우가 많다. 탑저널에 게재된 논문 중에도 그런 것들이 꽤나 많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방법론을 활용해 탄탄한 논지전개와 훌륭한 문장력'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그냥 보기에만 그럴듯 해보일뿐, 이미 영혼이 없는 죽은 논문과 다를바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가고자 하며 거리를 좁혀나가는 것이다. 그런 노력없이 무작정 나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과 차별되었고 매력적인 사람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수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앎에 대한 욕구를 가진채, 해결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자하는 연구가 좋은 연구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고민 없이, 새로움의 덫에 빠져 먼저 논문의 특별한점이나 차별점을 드러내려고 힘쓰는 것은 진정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올바른 접근은 아니라 여겨진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사실 연구자가 스스로 좋은 질문을 품은 후에 그 고민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연구자의 순수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하는 연구"
좋은 연구와 논문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이 아닐까. 논문을 읽다보면 그다지 눈이 획 돌아갈만한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쓰지 않았는데도, 연구자가 던지고 있는 질문 자체가 참 매력적이고 진정성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논문들이 있다. 그런 논문들은 읽다보면 저절로 몰입이되고, 이런 연구를 수행하여 논문을 써준 연구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한다.
나도 그런 논문을 쓰고 싶다. 쓰고자 한다.
* 마지막으로, 내가 이 글에서 적은 내용들은 사실 논문을 여러편 쓰는 것이 곧 실적이 되는 우리나라의 연구 시스템을 생각해봤을 때, 참 현실적인지 못한, 이상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또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나는 여전히 좋은 논문들은 대부분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론을 통한 신선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이론이나 방법론의 신선함을 가지고 있는 논문들이 다 좋은 논문은 아니다. 나의 논점은 좋은 논문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끝이 아니라 그 시작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