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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학기 첫 수업날이었다. 이번 학기에 신청한 과목은 구난희 교수님의 '역사와 사회과학'.
첫 수업이었지만 정말 유익했고, 수강 신청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교육의 새로운 조류에 대하여 그 내용을 살짝이나마 들을 수 있었고, 앞으로도 세계 각국의 역사 교육 방향에 대해 공부해나갈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었다.
교수님이 나눠주신 강의계획서에 적힌 참고논저 목록 중에는 특별히 관심이 가는게 있었다. 조한욱 교수님이 저술한 「사회사와 신문화사」. '신문화사'가 무엇일까. 교수님은 신문화사가 기존의 거시적인 역사 연구가 아닌 민중의 생활사와 같은 미시사를 말한다고 하셨다. 내가 평소에 늘 어렴풋이 갖고 있었던 생각! 역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종래의 무거운 거대 담론 위주의 교육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미시적이고 가볍게 접근해서 거시적으로 나아가는게 좋은 방법이 아닐까..
곧 도서관에 가서 조한욱 선생님이 쓰신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라는 책을 빌려 보았다. 이 책은 신문화사에 대해 개괄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하고 있는데, 나는 이런저런 내용 중에 '두껍게 읽기'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왔다.
'두껍게 읽기'는 대상이 가진 다양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연구한다면, 그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 누가 참여했는지를 조사하는 것은 얇게 읽기다. 한편,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다양한 맥락에서 분석하고 그 의미를 다른 여러 연관된 사건들과 비교하고 상상하며 찾아가는 것은 두껍게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대부분의 인문학 연구는 '두껍게 읽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과학에서 연구 방법론을 양적 연구와 질적연구로 나누는 것과 대비된다. 양적 연구는 통계적 방법과 계량적으로 수치화된 자료를 통해 거시적 흐름과 패턴을 파악하며 숲을 보도록 하는 연구라면, 질적연구는 상징적 의미를 추론하여 숨겨진 의미와 스토리(story)를 찾아나가며 숲과 함께 나무를 보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문학에서는 계량적 방법을 통한 연구가 매우 드물었고 대부분 두껍게 읽기와 유사한 질적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고민이 생기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디지털 인문학은 정보기술을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적용하려는 연구분야다. 디지털적인 방법으로 인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내가 느끼기에는) 양적인 자료를 통해 기존에 질적으로 연구되고 통용되던 지식을 더 명확히 드러내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즉, 양적 연구에 가깝다. 이는 기존의 인문학이 접근하지 못했던 루트로 지식에 접근한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도 있다. 첫번째는 인문학에서의 데이터를 통해 연구를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에서의 그것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에서 이루어지는 양적연구는 대부분 방대한 양의 '무작위 데이터'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한 연구자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런저런 통계적 방법으로 분석을 시도해보게된다. 하지만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에서는 남아있는 사료 자체가 매우 적기 때문에 위와 같은 형태의 양적 분석을 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결국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연구자가 의도를 가지고 입력한 소수의 데이터로 한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분석 자체는 큰 의미가 없게 된다. 이미 의도를 갖고 입력된 데이터들 속에서 연구자의 머릿 속 가설을 뛰어넘은 새로운 관계성이나 의미가 도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론 자체가 '기대하던 대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인문학 연구에서 데이터 분석을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분석'이 아니라 가설을 뒷받침 할 증거물의 수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교육에 있어서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인문학의 본질은 '두껍게 읽기'로 표현되는, 지식에 대한 맥락적 해석과 스토리에 대한 상상력이다. 실제로 인문 지식에 있어서는 피상적이고 얇은 정보를 습득하는 것보다 아니라 굵은 이야기들을 통해 나만의 두꺼운 상상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노드와 다른 노드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지식을 바라보는 디지털인문학적 접근은 오히려 얇게 읽기와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한 노드가 다양한 노드와 연결됨으로써 넓은 관계망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는 '두꺼운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것은 실제로는 두꺼운 것을 데이터로서 얇게 표현해내는 것 뿐이다. 즉, 디지털인문학은 복잡하고 다양한 상징들이 얽혀있는 인문 지식을 '추상적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인문학이 기존의 인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 인문학의 본성은 '추상적이고 명료한 세계'보다는 '구체적이고 복잡한 세계'와 가깝다. 또한 미래의 인문학 연구와 교육도 이 구체적이고 복잡한 세계를, 상상력을 통해 두껍게 읽어나가는 작업이 중심에 있어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좀 더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상상을 통한 접근은 거시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관련된 지식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약점을 보인다. 이 지점에서, 디지털인문학은 기존 인문학에서 구현하기 어려웠던,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디지털인문학이 미래의 인문학에서 주도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연구와 교육을 보완해주는 아카이빙과 시각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디지털인문학이 인문학 연구 그 자체를 정보 기술적 방법으로 대체하거나 교육을 전적으로 데이터 중심으로 이뤄나가기는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보완해줄 수는 있다.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지식 요소들을 더 큰 흐름과 패턴 속에서 읽어내도록 도와주는 시각화 기술, 그리고 기존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더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카이빙 기술.. 이는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들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디지털인문학은 그 자체로는 '두껍게 읽기'와 거리가 멀지만, 궁극적으로는 인문 지식에 두껍게 다가가는데 기여할 수 있다. 두껍게 읽는 작업은 텍스트와 나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와 함께 상상력을 통해 텍스트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연결해보려는 계속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디지털인문학은 인문학적 상상의 재료가 되는 텍스트를 효율적으로 검색하도록 하고, 시각화를 통해 거시적으로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연구자와 학생들이 자료를 찾는데 힘을 쏟기 보다는 자료 자체를 두껍게 읽어내는데 집중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연구하고 어떤 것에 관심을 두어야할 것인가. 내게 남겨진 숙제다. 하지만 디지털인문학에 대한 생각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나니, 내가 앞으로 해야할 것과 하고 싶은 분야가 좀 더 분명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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